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9세 (문단 편집) === 제4차 위그노 전쟁(1572~1573) ===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은 결국 군사행동을 불러 왔고, 가톨릭군은 둘로 나뉘어 앙리 드 몽모랑시의 군대가 소뮈에르를, 앙주 공 앙리의 군대가 생 시르와 라 로쉘을 포위했다. 1573년 5월에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 의회의 개입으로 라 로쉘의 포위망이 해제되었고, 7월에 '''<불로뉴 칙령>'''으로 전투가 종결되었다. <불로뉴 칙령>은 이전 위그노들에 부여된 권리를 축소하는 것으로, 모든 위그노들에게 과거 행동에 대한 사면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예배는 라 로쉘, 몽트방, 님의 세 도시에서만 허락되었고, 그것도 집안에서만 허용되었다. 상급재판권을 지닌 위그노 귀족들은 결혼식과 예배식을 올리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가족 이외의 참석은 10명으로 제한되었다. 앙주 공 앙리가 부재중인 사이, 샤를 9세와 막내동생인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다투게 되자 많은 위그노들이 보호와 지지를 구하면서 알랑송 공 프랑수아의 주변에 모여들었다. 1574년 2월에 생 제르망에서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목적은 궁정에 억류된 나바르 왕 앙리('헨리케 3세')와 콩데 공 앙리의 구출이었다. 하지만 동시에 노르망디, 보르도 등지에서 위그노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은 다시 재개되었다. 이렇게 [[앙리 2세]]의 비극적인 사고사 이후 조금씩 몰락하기 시작한 발루아-앙굴렘 왕가의 왕권은 샤를 9세의 치세에 이르러 크게 훼손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, 두 종파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카트린의 행동은 결국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으로 표출되었다. 원래 샤를 9세는 건장한 육체에 [[승마]]와 [[사냥]]을 즐겼으나, 외가인 메디시스(메디치) 가문으로부터 비롯된 유전성 [[폐결핵]]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고[* 현대의 의학으로도 결핵은 6개월~2년을 치료받아야하는데 과거에는 결핵이 아예 불치병이었다.], 잇딴 사건으로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.[* 환청이 들리고 고함을 지르며 헛소리를 했다.] 결국 폐결핵이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되었으며,[* 기침을 계속 했고 나주엥 가면 피가래를 뱉다가 아예 피를 토하게 되었다.] 동생 앙주 공 앙리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지 3개월 후인 1574년 5월, 뱅센 성에서 23세의 나이로 [[요절]]하고 말았다. 왕태후 카트린이 앙리가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에 취임한다고 선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